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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 올 때 게을러서 맛집을 열심히 찾지 못했다.

그래서 알고 있는 지인 찬스를 쓰기로 하고 지인에게 맛집을 추천받았다.

1. 버드나무집 - 싸고 양많은 해물 칼국수 in 중문

해물칼국수 먹다가 양이 많아서 낙오한 식당이다. 모든 해물 재료들은 생물만 취급한다. 오징어, 조개, 홍합 등등 맛깔스러운 국물을 내는 재료가 생물 상태로 투입되어 깔끔한 국물 맛을 자랑한다.

면발은 투박하지만 탱글탱글하다.
투박한 면발을 보니 손으로 면발을 뽑았음에 틀림없다. 개인적으로 수타면발과 기계면발 차이를 못느끼기에 평가는 패스.

2. 소반 - 제주 가정식 백반의 끝판왕 in 서귀포

인심좋은 제주 할머니의 손맛을 느끼고 싶으면 소반으로 오라. 주택가에 있어 주차가 쬐깐 어렵긴하지만 꼭 방문하길 권한다.

정성이 가득하고 비쥬얼이 황홀한 제주 가정식 백반을 한 상 받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너무 친절한 주인 아저씨와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은 정말 풍성하다. 돼지 두루치기, 된장찌개, 김치전, 갈치젓, 야채 등등이 화려한 미각의 오케스트라를 구성한다. 모든 반찬은 따뜻하게 나오고 갓 만든 것 같은 맛이 난다.

정성스러운 제주식 가정식에 밥상을 비우고 나면 그냥 행복해진다. 두분이 가정집을 개조하여만든 식당으로 두분이 바삐 움직이신다. 그래서 꼭 가야할 식당으로 추천을 하지만 두분이 더 바빠지실까봐 죄송하다.


3. 한라전복 - 시장에 위치한 전복 요리의 향연 in 대정읍 모슬포

여기는 허름한 시장에 위치한 전.복.전.문 식당이다.
여기에 있는 전복들은 양식장 직영 전복으로 최고의 양식 퀄러티와 신선도를 자랑한다.

여기는 메뉴판 자체가 커다란 유혹이다.
전복 뚝배기, 전복 라면, 전복 구이, 전복 돌솥밥 등 모두 주문하고 싶다. 하나씩 조금만 맛보게 코스 매뉴가 있으면 좋을텐데... 가량 에피타이저로 전복구이, 돌솥밥에 뚝배기가 같이 나오고 입가심으로 라면 ㅎㅎㅎ
생각만해도 행복하다.

우리는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뚝배기, 물회, 돌솥밥, 버터구이, 라면을 시켰다.
덕분에 젓가락은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닌다.

다 맛있다. 그리고 그 신선한 식감이 그대로 전달되어 감동을 준다. 배가 불러도 자꾸 먹게 된다.

4. 자매국수 - 제주도 고기국수의 원조 in 구제주

고기국수하면 제일 걱정되는 것은 돼지고기 누린내. 여기는 수십년의 노하우로 누린내 없는 깔끔한 국물맛을 자랑한다. 고기국수 제대로 하는 곳으로 줄늘 서서 먹어야 한다. 이미 널리 알려진 듯 하니 자랑은 여기까지만.

5. 갱이네 보말칼국수 - 보말의 풍미가 살아 있는 곳 in 도남로

제주도에서는 고둥을 보말이라고 한다. 싱싱한 보말을 아낌없이 투하하여 국수를 만드는 곳. 보말죽은 보말의 풍미를 느끼기에 좋다. 허름한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허름하지 않은 맛. 시원하고 개운한 국물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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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1100고지는 차로 편하게 한라산 정상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꼬불꼬불 토할 것 같은 길을 지나서 1100고지로 올라가면 어느덧 정상에 다다르다.

아래 사진은 그 전날 찍은 사진인데 같은 길이라도 이렇게 날씨가 다르다. 해안쪽에 아무리 해가 쨍쨍 비춰도 1100고지까지 맑다는 보장을 못한다. 한라산 정상 밑에 있기 때문에 구름이 어떻게 걸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1100고지에 도착하면 휴게소가 있고 휴게소 위에 전망대가 있어서 편하게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날씨만 좋다면...

아래 사진은 같은 곳 다른 날에 찍은 사진...

1100고지에 차를 세우고 전망대에서 한라산을 감상했다. 망원경으로 보니 산 능선을 따라서 백록담에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1100고지에는 습지를 보면서 산책할 수 있는 길이 잘 세팅되어 있다.

습지 위에 놓은 나무 데크를 걸으면 마치 아마존 밀림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태고의 야생의 느낌이 그대로 느껴진다.

호젓하게 10분 정도 걸으면 어느새 다시 1100고지 입구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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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름 혹은 금악오름으로 불리는 이곳은 가족들끼리 호젓하게 산책하기에 딱 좋다.

오름이 가파르지도 않으며 정상에서 보는 뷰는 절경이다.
무엇보다 정상에 있는 왕매연못은 절경이다.
마치 하늘을 비추는 거울같다.

금오름 올라가는 길은 평범하다.
어느 정도 포장되어 있어서 유모차 끌고가기에도 수월할 것 같다.

아이들도 신나게 걸어서 올라간다. 올라가면서 보이는 경치는 덤이다.

정상을 20분 가량 천천히 올라가니 탁 트인 광경이 보인다. 그 전날 비가 와서인지 왕매연못에 물이 꽤 고였다.

고인물오 하늘이 비춰졌는데 그 절묘함에 탄식이 나왔다. 연못까지 걸어갈 수 있다.
연못주위를 한 바퀴 돌고 오름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맞은편에서 바라본 구름의 모습.
오묘하기만 하다.

오름길은 멍석으로 잘 깔려져있어서 걷기 편하다. 탁트인 하늘에 양쪽으로는 갈대가 넘실대고 있는 이 길을 걷는 것 자체가 힐링이다.


이효리 뮤직 비디오에 나온 금오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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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에 있는 제주 자동차 박물관을 가자고 했을 때 뭐 볼 것이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독일의 메르세데스 박물관, BMW박물관 등 내노라하는 자동차 박물관들은 많이 가봐서 기대감은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여기는 개인이 소장한 자동차를 전시하는 박물관이기 때문에 고작 몇대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와~대박이다.이렇게 다양한 여러나라의 자동차들을 한 자리에서 보다니...

자동차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매니아 그리고 클래식카 매니아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 것이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도 클래식카에 대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이 곳에는 총 69대 차량이 전시되어 있는데 세계 27개 브랜드가 제작한 클래식카 59대와 국산차 10대 등이 있다.

대부분의 제작 시기는 1890~1970년대로서 클래식 차량을 보고 싶은 사람에는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입구 초입에 있는 모형 자동차들...

2시간이면 충분히 관람+면허증 따기 체험하기에 충분하다.

본격적으로 클래식 차량 구경을 했는데
개인이 이 많은 차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도대체 어떤 분이 이런 차들을 모았는지 검색해봤는데 그 주인공은 김영락 회장으로 범우화학이란 회사를 20년 넘게 운영하셨다고 한다.

돈은 이렇게 써야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신 분이시다.

나한테 제일 흥미로웠던 곳은 국산차 코너.
브리샤, 포니, 맵시나 등 그 옛날 흔했던 차들을 여기서 만나다니....

외국 차량 중에는 나무로 만든 힐만 스트레이트 8이 제일 인상깊다. 자동차를 나무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이것은 백튜더퓨처에 나오는 차 드로리언 아닌가!


자동차 구경을 하고나면 자동차 면허증을 딸 수 있는 체허 공간이 나온다.

운전면허 시험장을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만든 곳으로 그냥 재미삼아 하기엔 괜찮다.

암튼 별 기대없이 갔으나 대만족한 곳 제주 자동차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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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는 이중섭과 그의 가족이 그나마 행복하게 살았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향년 41세 나이에 가난과 싸우다가 떠난 이중섭의 삶에 대해 공부하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보며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르에서 만난 고흐가 생각이 났다. 예술적 열정과 대비되는 지독한 가난을 달고 살았던 두 천재 화가의 거주지를 방문을 하다보니 예술에 대한 광기어린 열정이 느껴져서 말못할 감동이 몰려온다.

그래서 그 두 감동을 동시에 맛보기 위해 까마귀를 소재로한 두 거장의 작품을 비교해본다.

이중섭이 그린 "달과 까마귀" 그 아래는 고흐의 "까마귀 나는 밀밭"

달과 까마귀는 이중섭이 죽기 2년 전에 그린 그림이다. 달빛 아래 전깃줄에 서있는 까마귀 가족들을 그리며 얼마나 가족들을 그리워 했을까?

또 반고흐는 석양 너머 어두 컴컴한 밀밭과 까마귀를 보면 자신의 우울함을 강력한 붓터치에 담아 열정으로 표현한다.

두 작품 모두 선이 굵지만 감정표현은 세밀하다. 그리고 화가의 손터치가 느껴진다.

이중섭 거리에는 꽤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아래는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들


드디어 들어가게 된 이중섭 거주지


이중섭이 1951년 1월 6.25 피난을 와서 아내와 두 아들과 정착한 곳이다. 이중섭 삶에게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이고 가족들과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단 12개월만.

이중섭은 1951년 12월에 다시 부산으로 떠난다. 그리고 가족들은 일본으로 생계를 해결하러 떠난다.






이중섭이 살았던 집은 초가집 모습 그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위의 그림은 주인집의 모습이지 이중섭이 살았던 공간은 아니다.


이중섭 가족은 아래 그림과 같이 창고와 같은 곳에 들어가야 나온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까말까 한 곳에 이중섭 가족은 1년을 지낸다. 어떻게 이 좁은 공간에서 4명이 지냈을지 생각하니 먹먹했다.

그러나 행복한 기억이 가득했으니...

그 위쪽에는 이중섭 미술관이 있다.

오리지널 작품읔 아니지만 이중섭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이중섭의 생애에 대해 잘 정리하였다.
소, 가족, 아이들, 까마귀, 게는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다.

위 그림은 담배값 포장지인 은지에 그린 가족과 자화상.

불행하게 살았던 예술가의 생애를 이렇게 봐서 다 이해를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천재화가의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는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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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시돌 목장은 임피제 신부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가 가난한 제주도민을 구제하기 위해 목축업을 시작한 곳이다.

처음에 갈 때는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목장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막상 가니 수도원과 성당까지 갖추고 있는 엄청 큰 가톨릭 성지였다.

이시돌 목장의 대표적인 건물 테쉬폰.
바그다드 양식의 건축물이 곡선으로 연결된 쇠사슬 형태라 거센바람에도 잘 견디는 건물형태이다.

이곳은 숙소로 쓰였다가 돈사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시돌 목장에서 직접 파는 아이스크림 엄청 맛있었다. 우유도 정말 고소하고...

그 다음 행선지는 오설록 티뮤지엄
분위기가 아모레 아모레스럽다. 예쁘게 사진 포인트 찍을 곳 많구...

오랜 세월을 투자하며 소중하게 가꾼 녹차밭이다.

변변한 땅도 없었을텐데 파도 파도 나오는 현무암 덩어리를 골라내고 골라내어서 개간한 밭에 만든 녹차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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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 컴퓨터 박물관은 제주 구시가지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컴퓨터 및 게임의 역사에 대해 잘 정리해놓은 박물관이었다.

어렸을 때 갖고 놀았던 재믹스, 겜보이, 16비트 컴퓨터 등등 희귀 아이템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귀한 경험이었다.

먼저 지하층은 카페테리아와 오락실이다.

와플을 주문했는데 키보드와 마우스 모양의 와플이 나왔다. 깨알같은 컴퓨터 박물관 소품이 아닐 수 없다.

게임기 역사를 디스플레이한 곳. 어렸을 적 많이한 게임팩들이 많이 보였다. 이곳은 직접 게임을 할 수 있는데 항상 사람들이 많아서 인내심있게 줄을 서야한다.

타자기와 워드프로세서의 역사.

지금의 넥슨을 만든 바람의 나라 시리즈.

관람을 하다보면 아이들이 게임에 정신팔려 엄마 아빠를 찾지도 않는다.

넥슨 컴퓨터 박물관이라 쓰고 넥슨 게임 박물관이라 읽는다.

초기의 마우스라고 하는 엥겔바르트 마우스 프로토타입 제품도 볼 수 있다.

초등학교 때 도스 명령어 배울 때 사용한 컴퓨터도 보인다.


나름 시간대별로 도슨트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어서 교육적으로도 알찬 시설인듯하다.

관람을 마치면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굳이 이 박물관은 왜 제주도에 세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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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은 최근에서야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슬픈 근현대사 사건이다.

내가 학교를 다닐때만 하더라도 여순사건, 4.3사건은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고 금기시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제주 4.3 평화 기념관이 생길 정도로 시대가 변했다.

이제 감추인 것은 없어지고 이제 역사의 평가를 받는 때가 온 것이다.


제주 4.3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한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균형된 사건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국가가 공권력을 이용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분명 잘못되었고 사죄를 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것 자체를 남로당에서 무장봉기했다는 사실도 간과하면 안된다. 

4.3사건의 도화선은 3.1발포사건이라고 한다. 3.1 발표사건은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좌익주도로 정치적 목표로 열기게 된다는 것을 알고 시간행진을 허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는 좌익이 동원한 3만명의 군중이 모여들었고 경창은 주변 경비 활동을 하였다. 행사를 끝낸 군중은 가두 시위를 하려는데 이 때에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쓰러졌다. 이를 군중들이 항의하는 과정에서 무장 경찰이 몰려오는 군중을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알고 발포하여 6명이 숨지게 되었다.


미군정은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좌익의 주도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촉구와 조직의 정비라는 목표로 열리게된다는 것을 알고 시가행진을 허가하지 않고 행사장소도 제주서비행장으로 하라고 했지만,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엔 좌익이 동원한 남로당민주주의민족전선민주주의청년동맹부녀동맹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기타군중 8,000명 등 총 3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주변 경비 활동을 하였다.[1][2]

행사를 끝낸 군중은 가두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작은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 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는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무장을 한 응원경찰은 몰려오는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걸로 알고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 이후로 경찰과 제주도민 사이의 갈등은 커져간다.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극우청년단인 서북청년단이 들어온다. 신임 도지사 유해진은 서청을 몰고오고 서청은 도민들을 빨갱이로 규정하여 빨갱이 사냥에 나선다. 

이러한 경찰의 탄압에 저항하고 남한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명이 무장하여 부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처결에 대한 도민들의 반감과 공포가 합해져서 양측 대립으로 제주도 전역을 번져나갔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그후 이승만 정부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시작한다. 해안선으로부터 5km이상 산간지대로 들어간 사람들은 무조건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총살하기 시작한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강제로 해안지대로 내려가고 이후에는 무차별한 학살이 시작된다.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보이는 사람들은 토벌하기 시작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 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고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무장대는 해체가 된다. 그러나 그 다음해 6.25전쟁 발발로 보도연맹 가입자와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서 제주 계엄군을 맡고 있던 해병대에 학살을 당하고 각지 형무소에 있던 4.3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이 금족지역이 개방되면서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린다.

4.3사건은 3만명 가량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는 500여명이었지만 사망자만 14,000여명에 달하는 비극을 낳았다. 전체 희생자 중 여성이 21% 어린이가 5.6%,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

6.25당시 많은 제주도민들이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4.3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니 아름답기만한 제주도가 아름다워서 슬프게 느껴졌다. 

바람이 쌩쌩부는 날씨와 돌밖에 없어서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이 땅이 제주도민에게는 얼마나 가혹했을까?

그나마 아름다운 풍경이 이들에게 위로였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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