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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러시아] 우수리스크, 연해주 독립운동의 본거지

 Ussuriysk 우수리스크는 굉장히 작은 시골 마을이다. 걸어서 30분 정도면 시내 어지간한 곳은 다 걸어다닐 수 있다.

작지만 이곳은 연해주 독립 운동의 본거지로서 한국인에게는 의미가 깊은 곳이다.

그 중에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곳이 최재형 가옥.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든든한 후원지로서 독립 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하신 분이다.

독립운동의 자금줄이라고 이 분은 원래 부잣집에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다. 노비의 아들로서 가족들이 쫓기듯 연해주로 도망쳐서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면서 부를 쌓았다.

이후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독립운동 후원을 자처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의 물질적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이 지역에 수많은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도 크게 하셨다.



유투브 비디오
하지만 아쉽게도 일본군의 대대적인 연해주 한인 학살시 목숨을 잃게 되셨다.

기업가, 독립운동가, 교육자로서 이 분보다 더 탁월한 분이 계셨을까? 최재형 선생의 업적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이 분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인물은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이다.
우수리스크에는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문신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신 이상설 선생은, 
한학을 배워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 합격자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젊어서 이미 대학자로 명망을 얻은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당시 한국인들 중 서구의 정치, 경제, 문화에 가장 해박한 축에 드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자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고 
1906년 이동녕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연해주로 이주,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였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여 전세계에 알리려 하였으나 일본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하였습니다. 
또한 이상설 선생은 연해주에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권업보(勸業報)》을 발행,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후 이상설 선생은 건강이 악화되어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였습니다. 다음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의 임종을 지켰던 동지들은 유언대로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이상설의 유해를 화장했으며, 
문고와 유품도 함께 거두어 불살라 그 재를 수이푼강에 날렸다고 합니다.

보재 이상설 선생 유허비 비문은 다음과 같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한국 충청북도 진천에서 탄생하여 1917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한 한국독립운동의 지도자이다. 

1907년 7월 광무(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이준, 이위종 등을 대동하고 사행(使行)하여 한국독립을 주장하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바로 옆으로 흐르는 세찬 강물을 보며 독립을 염원하는 그 마음이 눈물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고려인 기념관

생각보다 컨텐츠는 빈약했지만 그래도 뒤늦게나미 이런 기념관이 생각다는 것이 다행이다.

까레이스키의 고단한 삶을 잘 담아낸 이 박물관은 연해주 지역을 이해하기 위한 개론 역할을 톡톡히 한다.


우수리스크 위치